Bray의 치유여정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브레이 Bray 2020. 9. 14. 01:16

춤, 음악, 미술, 영화 등등

보는 순간, 혹은 듣는 순간 바로 접속될 때가 있다.

이것을 예술적 체험이라 하는가?

상위 자아끼리 접속되는 게 틀림없다.

오늘, 구스타프 클림트의 영혼과 그렇게 연결되었다.

 

 

얼마 전 당근 마켓에서 분양받은 그림 액자가 있다.

발레 그림 걍 준다고 해서 냉큼 받으러 갔다가

이사 중이라며 이 그림도 함께 얻어왔는데,

액자의 세로 길이가 무려 1미터가 넘는 대형 초상화.ㅠㅠ

 

Gustav Klimt

 

 

 

댄스투리폼에 걸어두고 싶었으나 사이즈가 너무 큰 관계로

필요한 다른 집에 선물해서 그 집 벽에 자리 잡았다.

처음 만났을 때 예사롭지 않은 포스를 느끼긴 했으나

나와의 인연은 아니라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늘 우연히 방문했다가 그림을 다시 보게 되었고

소녀의 눈과, 입고 있는 드레스에 눈길이 자꾸 가는 거라... 

소녀가 잠깐 이리 와보라고 속삭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곁눈질로 몇 차례 보다가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니... 오~

쿤달 발전기를 건드리는 뭔가 깊은 에너지가 느껴진다.

 

'모지?' 하다가 나도 모르게 그림에 얼굴을 들이대고 

초상화 밑에 쬐그마한 글씨로 쓰여있는 작가 이름을 확인했다.

Gustav Klimt!

 

Gustav Klimt

 

작가가 누구인지 몰랐을 뿐,

이미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신 분이다.

 

Gustav Klimt _Kiss

 

검색으로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에 대한 정보를 둘러보다

오늘의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프랑스 수학자 뿌앙까레 가설을 풀고 노벨상을 거부한 

그레고리 페렐만을 만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상위 자아끼리 연결되는 것 같은?

그리고 그들의 삶을 글로 보는데 낯설지 않고

연대감, 유대감 심지어는 동질감이 샘솟는다.

 

오버인 줄 아는데... 그래도 할 수 없다.

100년 전 구스타프 클림트가 남 같지 않은 것이

왠지 내 전생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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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클림트는 수수께끼 같은 화가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그림에 대해 한 번도 설명한 적이 없고, 인터뷰도 하지 않았으며, 사생활은 철저히 숨겼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그림이 풍기는 매력이 한층 돋보이게 된 것일까? 사후 50년 후부터 재평가되기 시작하더니 언제부턴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화가로 손꼽히게 되었다. 

 

19세기 말 클림트를 비롯한 혁신적인 예술가들은 빈 미술가협회의 회원이었으나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중견과 원로들의 작품을 참을 수 없었다. 이들은 빈 미술가협회로부터 분리(독립)를 꿈꾸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권력이란 안정적인 활동을 보장하는 울타리가 되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감과 도전정신이 넘쳤던 클림트는 안주를 거부하고 ‘빈 분리파’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1897년 4월 3일, 클림트를 회장으로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공예가인 콜로먼 모저, 건축가 오토 바그너,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 등이 함께한 빈 분리파는 빈 미술가협회에 공식 통보하고 조촐한 창설식을 올림으로써 세상에 그 존재를 알렸다.

 

빈 분리파는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라는 표어를 내세워 매너리즘에 빠진 미술가협회에 맞섰다. 그들은 이제 검열에 통과하려고 애쓰지 않았고 오직 진실만을 생각하고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솔직하고 대담하게 그렸다. 빈 분리파는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되는 수공예를 위한 투쟁이기도 했다. 이들은 ‘부자를 위한 예술과 가난한 자를 위한 예술’을 일치시키고자 했고, 감각적인 예술을 추구했다. 아울러 모든 예술 영역의 요소들을 이용하여 종합예술작품을 만들고자 했으며 나아가 자신들의 작품으로 사회를 변혁하려 했다. 바야흐로 유럽 작단의 아틀리에에 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었다.

 

1902년 제14회 분리주의 전시회. 이 전시회의 백미는 무엇보다도 클림트가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모티프로 그린 벽화 <베토벤 프리즈>였다. 벌거벗은 여인들의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시작되는 그림은 온갖 악마의 위협적인 공간을 지나, 마침내 합창하는 여인들 사이에서 두 남녀가 뜨겁게 포옹하고 키스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한 영웅이 무절제한 여인들의 유혹과 악마들의 방해를 물리치고 마침내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이야말로 클림트가 꿈꾸는 유토피아의 실현, 예술에 대한 끝없는 갈망과 사랑을 노래한 상징주의의 절정이었으며 다양한 기법을 활용한 응용미술의 극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난잡함과 향락과 무절제가 그려진 이 작품에 대해 관람객들은 반감을 일으켰고, 그들의 싸늘한 시선은 빈 분리파의 열정을 얼어붙게 했다.

 

클림트에게 또 다른 시련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빈 대학의 천장 도안으로 그린 <철학>, <의학>, <법학> 시리즈 때문이었다. 클림트는 나체의 임신부를 비롯한 벌거벗은 사람들, 혼돈 속에서 무기력하게 떠도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통해 병에 들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고뇌에 찬 인간의 불안한 심리와 필연적인 운명과 삶의 부조리를 표현했다. 1903년 <법학>이 완성되자 클림트의 작품들은 대학 건물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판정을 받았다. 클림트는 그 작품들을 새로 건축한 현대미술관에 전시할 것을 제안받았지만, 본래 그림의 목적과 어긋나는 일이라며 거절하였다. 클림트는 이렇게 나체와 성을 대담하게 표현하면서 대중의 고상한 취향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의 인기는 식어갔고, 빈 분리파 안에서도 지지를 잃었다.

 

클림트는 1904년 빈 분리파 전시회에 <물뱀 II>를 출품하는 것을 끝으로 이듬해에는 빈 분리파를 떠나고 만다. 빈 분리파를 떠났다고 해서 분리파 이념까지 버렸다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때부터가 진정한 분리파를 실현한 시기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때부터 클림트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활을 누리게 되는데, 대가에게는 그것이 또한 최상의 작업 조건이 되었다. 그는 어차피 단체와는 어울리지 않는 누구보다도 고집 센 사람이었고, 더욱이 어떤 것에도 얽매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제 독창적인 예술세계에 몰두하여 특별한 세계를 구축해나갔다. 그리하여 <키스>(1907~1908), <다나에>(1907~1908) 등 이른바 ‘황금 시기’의 대작과 클림트의 예술세계를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풍경화를 포함한 명작들이 우리 앞에 선보이게 된 것이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생전에 이미 유명 작가였지만, 한편으로는 영욕이 교차하는 경험을 거듭했다. 그가 빈번하게 그린 나체와 섹스 장면이 줄곧 문제 되었던 것이다. 20세기 말 클림트의 작품들이 급부상하더니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화가가 되었다. 한때는 외설로 여겨졌던 것이 지금은 참으로 부드러운 낭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실로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인간의 육체가 발하는 미묘한 숭고함을 느낄 수 있다.

 

클림트의 전기를 쓴 니나 크랜젤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수수께끼를 내는 스핑크스 인지도 모른다. 다행히 이 스핑크스는 우리가 답을 맞히지 못하더라도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고민하고 즐길 뿐이다. 그의 그림을 즐기다가 우리는 문득 그가 향락 속에 빠진 듯한 생활 속에서도 진정한 사랑과 자유를 갈구했음을, 끝내 그것들을 구할 수 없었음을 가슴 아프게 확인하고야 만다. 그러나 그의 작품만은 인간 구원의 황홀경을 참으로 숭고하면서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구스타프 클림트에 열광하는 이유가 아닐까?

 

[네이버 지식백과]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 오스트리아 화가 (인물 세계사, 차창룡)